
SEC 소송이 끝났는데 왜 XRP는 5,000원을 넘지 못했을까요. 리플이 JP모건, 마스터카드와 손을 잡고 미국 국채를 XRP 레저 위에서 5초 만에 결제하는 실험까지 성공했는데, 정작 가격은 기대를 밑돌았습니다. 저도 오래 XRP를 들고 있으면서 이 답답함을 직접 체감했고, 그러면서 리플이라는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다시 뜯어보게 됐습니다.
리또속은 왜 반복됐나 — 리플의 탄생과 설계 철학
리플에 또 속았다는 뜻의 '리또속'이라는 말이 생겨난 건 우연이 아닙니다. 2017년 12월 단 한 달 만에 300원에서 4,900원까지 치솟았던 XRP는 곧바로 1,000원 아래로 곤두박질쳤고, 그 손실을 회복하는 데 무려 7년이 걸렸습니다. 저도 그 긴 시간을 버텼고, '이번엔 다르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그런데 이 반복적인 실망을 이해하려면 리플이 애초에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부터 짚어야 합니다. 리플은 2012년 크리스 라슨, 제드 맥케일럽, 브래드 갈링하우스가 함께 설립했습니다. 이 중 크리스 라슨은 미국 최초의 인터넷 주택담보대출 서비스 '이론'과 P2P 개인 간 대출 플랫폼 '프로스퍼'를 창업한 핀테크 베테랑입니다. 그의 사업 공식은 처음부터 일관됐습니다. 진짜 고객은 개인이 아닌 은행이다.
반면 제드 맥케일럽은 결제망은 인터넷처럼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공공재여야 한다는 철학을 가졌습니다. 두 사람의 경영 노선이 충돌하면서 맥케일럽은 회사를 나가 스텔라 루맨을 창업했고, 리플은 완전한 친은행 노선을 걷게 됩니다. 그러니까 리플은 스위프트를 무너뜨리려는 혁명가가 아니라, 은행에게 '스위프트 대신 우리 블록체인 쓰세요'라고 영업하는 세일즈맨에 가깝다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이 설계 철학이 XRP의 8년 역사 전체를 설명한다고 봅니다.
XRP 레저와 ODL — 기술은 충분했다
기술력 자체가 문제였던 건 아닙니다. 비트코인이 막대한 전력을 소모하며 채굴로 거래를 검증하는 것과 달리, XRP 레저(XRPL)는 채굴이 없습니다. 여기서 XRP 레저란 신뢰할 수 있는 검증 기관들이 서로 서명·합의해 거래를 확정하는 분산 원장 시스템으로, 거래 체결에 걸리는 시간이 단 3~5초, 수수료는 사실상 0에 가깝습니다. 처음부터 은행용으로 설계된 만큼 속도와 비용 면에서 경쟁 상대가 없는 수준입니다.
그 위에 올라선 핵심 서비스가 ODL(온디맨드 리퀴디티)입니다. ODL이란 실시간 유동성 공급 메커니즘으로, 쉽게 말해 해외 송금 시 현지 은행에 미리 돈을 묶어두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기술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 은행이 필리핀으로 송금할 경우, 기존에는 필리핀 현지 은행 계좌에 페소화를 미리 예치해 두어야 했습니다. 그 돈은 이자도 못 받고 묶이는 셈이었죠. 반면 ODL을 쓰면 송금 버튼을 누르는 순간 원화가 XRP로 바뀌고, 그 XRP가 3초 안에 페소로 환전돼 상대방 계좌에 꽂힙니다.
이때 XRP는 두 통화 사이를 잇는 브릿지 자산 역할을 합니다. 브릿지 자산이란 서로 다른 통화 간 교환을 중개하는 매개 수단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XRP라는 코인의 존재 이유이자 심장입니다. JP모건 추산 기준 2024년 국경 간 결제 시장 규모는 194조 달러(출처: JP Morgan)에 달하며, 이 거대한 시장을 XRP 브릿지로 연결하겠다는 것이 리플의 포부입니다. 실제로 ODL은 현재도 동남아와 중남미 일부 구간에서 실제 가동 중입니다.
- XRP 레저 거래 확정 시간: 3~5초 (비트코인 대비 수백 배 빠름)
- ODL: 해외 송금 시 현지 예치금 불필요, XRP가 브릿지 자산으로 작동
- 국경 간 결제 시장 규모: 194조 달러(2024년 기준, JP Morgan)
- 리플은 글로벌 금융 메시지 표준 협의체에 정식 참여 중
SEC 소송 종료 이후 — 호재는 왜 가격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2020년 12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리플을 미등록 증권 판매 혐의로 전격 고소했을 때, XRP는 순식간에 주요 미국 거래소에서 줄줄이 상장 폐지됐습니다. 저도 그때 XRP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하고 많은 코인 중에 왜 리플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몇 달간 달고 살았습니다.
전환점은 2023년 7월 토레스 판사의 판결이었습니다. "거래소에서 일반인에게 판매된 XRP는 증권이 아니다"라는 결론이 나왔고, 이 판결은 XRP 하나만이 아니라 미국에서 거래되던 수많은 알트코인의 숨통을 함께 틔워준 선례가 됐습니다. 이후 SEC 수장이 친크립토 성향의 폴 앳킨스로 교체되면서 기조가 바뀌었고, 2025년 8월 SEC와 리플이 양측 항소를 취하하며 5년간의 법적 공방이 완전히 마무리됐습니다(출처: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SEC).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소송 종료라는 초대형 호재가 왜 기대만큼의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았는지에 대해 저는 세 가지로 봅니다. 첫째, 호재는 이미 가격에 선반영됐습니다. 800원이던 XRP가 소송 기대감으로 4,000원대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대부분 소모된 겁니다. 5,000원 이상을 보려면 추가 호재가 얹혀야 했는데 그게 없었습니다. 둘째, 클레리티 법안이 미국 상원 표결을 통과하지 못하면서 법률적 최종 확정이 지연됐습니다. 셋째, 그 시기 암호화폐 전반에 매크로 역풍이 불었습니다. 다만 2026년 3월 SEC와 CFTC 공동 합의로 XRP가 비트코인, 이더리움과 동일한 디지털 상품으로 분류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이것이 무너진 건 아닙니다.
RLUSD의 등장 — XRP의 적인가, 지원군인가
2024년 12월 리플이 자체 스테이블 코인 RLUSD를 공식 출범했습니다. 스테이블 코인이란 특정 법정 화폐에 1대1로 가치를 고정시킨 디지털 자산으로, RLUSD는 미국 달러와 1:1로 연동됩니다. 미국 금융감독청의 규제 아래 정식 인가를 받은 신탁 회사가 발행하며, 출시 후 유통량이 23억 달러(약 3조 원)를 넘어서며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RLUSD가 나오자마자 XRP 투자자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논리는 이렇습니다. 가격 변동성을 극도로 싫어하는 은행 입장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RLUSD가 XRP보다 훨씬 매력적인 브릿지 수단 아닌가. 리플이라는 회사가 자기 손으로 만든 스테이블 코인으로 XRP의 자리를 빼앗는 게 아니냐는 걱정이었습니다.
저는 그 구조를 조금 다르게 봅니다. RLUSD는 XRP 레저 위에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RLUSD의 거래량이 폭발할수록 XRP 레저라는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기관이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은행들이 RLUSD로 달러 권역 안에서 익숙해지고 나면, 달러와 달러가 아닌 통화 사이의 국경 간 결제에서는 결국 XRP라는 브릿지 자산이 필요합니다. RLUSD는 달러 안에 갇혀 있지만 서로 다른 두 통화를 넘나드는 다리는 XRP의 몫입니다. 실제로 2026년 6월 JP모건과 마스터카드가 진행한 미국 국채 결제 실험에서도 RLUSD와 XRP 레저가 한 세트로 가동됐습니다. 지금은 적이 아닌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현재 XRP 가격이 사업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은행들이 아직 RLUSD와 리플 소프트웨어로 적응 단계를 밟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인프라가 완전히 익숙해지고 거래 규모가 천문학적으로 커졌을 때, 자본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XRP를 본격적으로 끌어다 쓸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 경우엔 이 시차를 인정하고 투자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시차가 얼마나 길어질지는 솔직히 아무도 모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XRP는 증권인가요, 아닌가요?
A. 일반적으로 증권 리스크가 아직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2023년 법원 판결에서 거래소를 통해 일반인에게 판매된 XRP는 증권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여기에 더해 2026년 3월 SEC와 CFTC 공동 합의로 XRP는 비트코인, 이더리움과 동일한 디지털 상품으로 공식 분류됐습니다. 클레리티 법안이 아직 통과되지 않았지만, 현재 규제 지위 자체가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Q. RLUSD가 커지면 XRP는 필요 없어지는 건가요?
A. RLUSD는 달러와 달러 사이의 거래에서 안정적인 결제 수단으로 기능하지만, 서로 다른 통화 간 국경 간 결제에서는 여전히 XRP의 브릿지 자산 역할이 필요합니다. 두 자산은 경쟁 관계라기보다 역할 분담 구조로 봐야 합니다. 실제로 RLUSD도 XRP 레저 위에서 구동되기 때문에, RLUSD 거래가 늘수록 XRP 레저의 활용도도 함께 높아집니다.
Q. 좋은 뉴스가 나왔는데 왜 XRP 가격은 안 오르나요?
A. 제 경험상, 좋은 뉴스는 대부분 이미 기대감으로 선반영된 이후에 발표됩니다. SEC 소송 종료처럼 큰 호재조차 이미 800원대에서 4,000원대로 오르는 과정에서 소모됐습니다. 중요한 건 그 소식이 실제 XRP 수요로 연결되는지를 따지는 것이고, 현재는 리플의 사업 성장과 XRP 토큰 가격 사이에 시차가 존재하는 구간입니다.
Q. ODL이 실제로 쓰이고 있나요?
A. 네, ODL은 현재 동남아시아와 중남미 일부 송금 구간에서 실제로 가동 중입니다. 다만 아직 전체 국제 송금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습니다. 은행들이 새 결제망에 진입할 때는 스테이블 코인으로 먼저 적응한 뒤 브릿지 자산 활용을 늘리는 수순을 밟기 때문에, 본격적인 ODL 수요 확대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결론
XRP는 기존 은행을 무너뜨리려고 나온 코인이 아니라, 은행에게 팔기 위해 나온 코인입니다. 그 전략은 분명히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SEC 소송은 종료됐고, 현물 ETF 7개가 승인됐으며, JP모건부터 싱가포르 DBS까지 세계 유수의 기관들이 XRP 레저 위에 올라타고 있습니다.
다만 그 성장의 과실이 지금 당장 XRP 토큰 가격으로 1대 1 연결되지 않는다는 게 현실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이 시차를 버텨왔고, 솔직히 허탈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지켜보는 이유는 밈코인과 달리 실제 금융 인프라와 연결되는 방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차가 몇 달일지 몇 년일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 시차를 감당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보는 것이 XRP 투자의 가장 중요한 숙제라고 봅니다.